설교말씀

2020-11-29 "복음으로 바뀐 인생"-(갈1:11~24)
2021-03-08 21:37:06 지음교회 조회 1501

201129-주일낮예배(갈라디아서 강해3)

 

복음으로 바뀐 인생

◈ 갈 1:11~24 ◈

 

한국 교회에서 유명한 해석내용이지만 사실과 다른 잘못된 해석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사울이 예수님을 믿고나서 바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고부터 ‘큰 자’라는 의미의 사울에서 ‘작은 자’라는 바울로 겸손해졌다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 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선 사울이라는 이름의 뜻은 ‘큰 자’가 아니라 ‘간구하여 얻은 자’ 또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라는 뜻으로 전형적인 유대인의 이름이며, 특히 바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에선 사울왕으로 인해 흔한 이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은 맞지만, 겸손해서 스스로 낮추어 부른 이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헬라 문화권인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로마시민권을 가진 채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어릴 때 부르는 헬라식 이름이 ‘바울’이었고, 선교사역을 시작하면서 헬라인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유대식 이름인 사울이 아니라 헬라식 이름인 바울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바울이 되었다는 메시지는 많은 은혜를 끼쳤습니다.

오늘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유대주의자들이 전한 다른 복음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고, ‘사울에서 바울로’ 변하게 된 배경과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는지를 살펴보고 은혜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1. 바울이 받은 사도직과 복음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유대주의자들이 전한 다른 복음과 왜 다른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라고 말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굳이 드러내지 않았던 것인데, 이제 너희에게 알려야만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은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배격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며, 또한 사람에게서 받았거나, 배운 것도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바울은 불순한 의도로 복음을 함부로 바꾸거나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대주의자들이야 말로 사람의 뜻을 따라 만들어진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의 필수라고 주장하는 할례와 율법 준수는 결국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행동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부정해지는 여러 가지 상황들에 대한 주의를 통해, 그것을 조심하므로 의롭게 된다는 생각이 사람의 뜻과 의지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선포하지만, 그것은 기본 조건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와 반대로 바울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닌,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복음임을 선포합니다. 사람의 뜻을 따르는 것과 정반대의 개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는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말한 1절과 유사합니다. 즉 자신의 사도권과 자신이 전한 복음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에게 주신 계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주신 계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지 않으시면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오늘날에도 이런 계시가 있을까요?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기 뜻을 계시하시는 이전 방식은 중단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고 교회를 향한 자기의 뜻을 선포하시고, 진리를 보다 더 잘 보존하고 보급하며, 육신의 부패와 사탄과 세상의 악의를 대항하여 교회를 보다 확실하게 세우고 위로하실 목적으로 기록된 성경 외에 새롭게 다시 기록할 목적으로 계시하시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이제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이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를 부르신 이유와 관계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주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택하신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9:15). 바울은 그 말씀 그대로 이스라엘 자손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히 이 편지를 받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이방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고, 그 사명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만을 선포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도, 할례를 행치 않았어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믿고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점을 말입니다.

바른 복음 위에 바른 믿음으로 서 계신 지음가족 여러분!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목사의 말로 듣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십니까? 복음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설교자는 신약이나 구약이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복음 곧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을 믿고 의지하므로 바른 믿음에 굳게 섭시다.

 

2. 복음을 받기 전의 바울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의 복음을 받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밝힙니다. 13절에서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라고 하는데, 이는 갈라디아 교회를 세울 때에 자신의 과거를 간증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교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여 멸하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에 의해서 많은 믿는 자들이 핍박을 받았고, 잡혔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에는 증인들이 옷을 벗어 바울의 앞에 두었는데, 그만큼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었다는 의미입니다(행7:58). 심지어는 위협과 살기가 등등해서 주도적으로 유대 땅이 아닌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 중 예수를 믿는 자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는 일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열심은 웬만하면 할 수 없습니다. 유대의 종교법이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다메섹까지 가겠다는 것은 그만큼 열심을 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그가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을까요? 그의 삶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유대 땅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부여받은 자였습니다. 신분적으로 일반적인 유대인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로마시민권을 가진 바울이지만, 오히려 로마시민권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는 로마시민이기보다 유대인이길 원했고, 그래서 당시 최고의 학파였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엄격한 삶을 사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 살려고 했습니다. 그때마다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시민권자입니다. 이것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 유대인들에게는 매국노와 같은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럴수록 그가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유대인 동년배보다 더 유대교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자. 남들보다 더 열심을 내자. 그러면 언젠가는 나도 진짜 유대인이라고 차별없이 받아주겠지.’ 이런 생각을 가지면 남들보다 더 극단적인 열심을 냅니다. 그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낸다고 낸 열심은 다름 아닌 나사렛 이단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사도로 사용하시기 위해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셨습니다. 이 표현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표현입니다. 즉 자신은 구약의 선지자처럼 하나님이 모태에서부터 택하신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사도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택하시고 부르셨다는 것은 그야말로 은혜입니다. 천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 중의 죄인인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부르시니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다시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은 할례를 행하기도 전에 택정함 받았고, 교회를 박해해도 은혜로 부름을 받았으니, 이방인들도 할례와 상관없이 택정함을 받고, 부르심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시고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택정하심을 입고,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지음가족 여러분! 바울의 간증이 다름 아닌 우리의 간증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에 열심을 내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여러 모양으로 박해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고, 은혜로 부르셔서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는 자가 별난 자가 아니라, 믿기 전의 모든 사람이 다른 것에 빠져서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자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택해주시고, 은혜를 부르셔서 이 자리에 있는 것임을 알고 감사합시다.

 

3. 복음에 반응한 바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하는 사명을 바울에게 주시고,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는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계시를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그는 과거와 같은 박해자, 핍박자의 삶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때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이것은 그가 전한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안달복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헌신하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사도가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도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말의 뉘앙스는 자신이 이미 사도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을 다른 사도에게 인정받으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이 굳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만나지 않아도 주님이 자신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도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3년간 아라비아에서 일종의 선지학교를 경험합니다. 그곳에서 구약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 그리고 계시의 말씀을 깨닫는 시간을 보내었을 것입니다. 삼 년 후에 예루살렘에 갔지만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를 방문하는 정도였다고 밝힙니다. 이 또한 그가 더 이상 잘못된 열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을 뿐 아니라, 사람의 인정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진 자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갔습니다. 수리아는 바울이 바나바의 요청으로 함께 사역한 안디옥이 있는 곳이며,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 다소가 있는 지역입니다. 그곳의 교회들은 바울과는 개인적인 친분은 없어서 얼굴을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에 대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교회를 박해하던 자가 이제는 믿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자들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핍박자도 전도자로 바꾸는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핍박자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로 변화된 것이야말로 복음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이방인이 하나님을 만나 자녀가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로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기 원하시는 지음가족 여러분! 복음을 듣고 여러분의 삶이 바뀌었다면, 자연스럽게 여러분의 변화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주의 일꾼이 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주신 은혜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며, 그것을 통해 결국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길 기도하는 성도가 됩시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핍박자였다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복음이 바꾸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은 잘못된 열심을 내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후에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그가 가는 곳마다 위협과 살기가 가득했지만, 새 사람이 된 후에는 참된 복음이 넘치고, 하나님의 영광이 넘쳤습니다. 우리도 이런 삶을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우리를 이렇게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뜻으로 된 거짓 복음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된 복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역사를 꿈꾸며,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삽시다. 그렇게 살기 원하시는 분들은 찬송가 453장으로 주신 말씀에 응답찬송을 올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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