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2020-11-15 "감사는 참된 믿음입니다"-(눅17:11~19)-추수감사주일
2021-03-07 22:19:59 지음교회 조회 577

201115-주일 낮예배(추수감사주일)

 

감사가 참된 믿음입니다

◈ 본문 : 눅 17:11~19 ◈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일상을 포기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과 근심걱정으로 시간을 보내었지만, 그래도 2020년의 추수의 기쁨,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추수감사주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때에 과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집니다. 코로나19 감염자가 1주일 동안 100명 이상씩 나오고, 심지어는 200명을 돌파하기도 해서, 일상생활을 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환경을 가졌기에, 또는 남들보다 더 풍성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항상 감사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삶의 비참함을 경험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겪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고,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었는지를 보면서 우리의 삶을 되새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문제의 해결책은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을 때 나병환자들을 만난 사건입니다. 일반적으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갈 때에는 사마리아 지역을 가로지르기보다 돌아갔습니다. 이는 사마리아인들이 신앙의 순결도 잃어버린 버린 받은 혼혈족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을 피해서 멀더라도 돌아갔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처럼 사마리아 지역을 일부러 피해간 것입니다. 그런데 차별이 없으신 예수님이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평소 때 같으면 사마리아 지역을 그냥 지나가셨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시기도 하셨지 않습니까? 주님이 이 길로 가신 것은 다름아닌 10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일반적으로 문둥병이라 불리는 나병은 살아있지만 살이 썩어가는 병입니다. 그래서 저주의 병이며, 천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남들이 겪지 못한 비참함을 맞이한 자들이었습니다. 병을 나을 방법이 없었고, 또한 희망조차 없던 자들, 그들에겐 삶이란 비참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 10명의 나병환자들의 구성을 보십시오. 이들 중에는 유대인도 있지만, 사마리아인도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함께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천벌이라 생각한 나병을 앓고 있기에 차별하지 않고 어울려 다녔습니다. 나병에 걸린 유대인은 이미 부정한 자이기 때문에 사마리아인과 함께해도 상관없기 때문이며, 또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의지하며 살자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따라 성에는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지역뿐 아니라 사마리아 지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성이나 마을에 함부로 들어가면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또 마을 밖에 있더라도 사람들이 보이면,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크게 외쳐야 했습니다. 만약 외치지 않고 사람들 가까이에 가면 돌로 쳐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철저히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거부된 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치료는 꿈도 꿀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치료해줄 의사는커녕 치료 방법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있는 근처 마을에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가망이 없는 병자를 고치시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신 분이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을에 들어가서 비록 주님 가까이는 가지 못해 멀리서 소리치며 부릅니다. 그런데 이것은 목숨을 건 행동입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가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원했고, 예수님을 만나면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목숨을 건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자신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낫게 해 주실 분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희망을 찾으신 지음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코로나19라는 상황으로 인해 일상이 무너지고 힘든 시절을 보내고 계십니까? 그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노력을 하셨던 간에 주님을 만나야만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니 주님을 만나기 위해 목숨을 거십시오. 여러 장애가 있더라고 목숨을 걸고 주님을 만나면 참된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2.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을 만난 10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절박함이 담긴 외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생님”은 율법 선생을 의미하는 ‘랍비’가 아닙니다. 이 선생님은 가르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고, 우두머리이나 사령관이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전까지 아무도 주님을 향하여 “사령관님이여”라고 부른 자가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주님을 “선생님이여”라고 불렀지만, 그 속에는 교사라는 의미만 담겨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주님을 향하여 “사령관”이란 의미의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복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고백처럼 주님은 거부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외침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백처럼 사령관으로서 그들에게 명령하십니다. 간단하지만 단호한 명령입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여라” 이는 나병의 완치 여부를 제사장이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10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몸에 아무런 변화가 없음에도 의심없이 제사장을 만나러 갔습니다. 사령관의 명령인데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순종은 즉시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나중에 하려고 하면 제대로 된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은 그 즉시 하는 것입니다.

즉시 순종한 10명의 나병환자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만나러 가기 시작할 때는 나병환자였는데, 순종하여 길을 가자 곧 나병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목적을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피부는 마치 새 생명을 얻은 것 같은 마음을 가지게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순종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만일 그 10명이 의심을 하고 제사장으로 가지 않았다면 이 기적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믿고 순종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대표적인 나병환자였던 아람의 나아만 장군도 요단강에 7번 몸을 씻는 순종을 했을 때 깨끗해짐을 얻었습니다. 어디 이것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놀라운 기적이 시작됩니다.

새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신 지음가족 여러분! 하나님의 기적을 계속 맛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순종하면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어떤 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던지 간에 순종하십시오. 그럼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3. 감사는 참된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제 10명의 나병환자들은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제사장에게 가기 바빴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기도 하거니와 제사장만이 자신들의 완치를 선언할 수 있으며, 완치판정을 받아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일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입니다. 비록 그들에게 떨어진 명령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0명 중 9명은 곧바로 제사장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1명은 가던 길을 되돌아서 예수님께로 달려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이 명령한 것을 어기고 다시 되돌아온 사람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삼상 15장22절의 말씀을 잘 압니다. 순종하지 않고 형식적인 제사를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순종은 제대로 된 순종이 아니라 맹목적인 추종이며, 마음에 없는 행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되돌아온 1명은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했습니다. 그런데 이 행위는 율법으로 보면 심각한 범죄행위입니다. 그 사람은 제사장의 완치 선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부정한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확신한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예수님 발아래 엎드린 것입니다. 반면에 9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병은 나았지만, 예수님께 감사를 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예수님을 선지자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17장 9절처럼 종에게는 사례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되돌아온 한 명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 깨달은 것입니다. 종이 아니라 주인이시고, 제사장이 아닌 하나님의 완치 선언을 얻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완치시켜 주셨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고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심지어 돌아온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혼합족속으로 당시 유대인들에게 인간 취급받지 못하던 자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언하십니다. 9명의 유대인이 아니라 1명의 사마리아인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혈통적으로 구원 얻는다고 생각하던 유대인들의 생각에 큰 도전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가 구원받은 것은 그의 믿음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 신앙고백을 담아 감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진정한 믿음은 감사를 통해 나타납니다. 감사가 없는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반면에 신앙고백을 담은 감사가 있는 믿음은 구원 얻는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입으신 지음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 감사하십니까? 그리고 누구에게 감사를 드립니까? 무슨 일이든지 감사하십시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길 원합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을 소유하려면 주님을 향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비록 주변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주님께 엎드리고 감사할 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감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영광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10명의 나병환자는 비참함을 안고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우리가 바로 10명의 나병환자와 같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비참함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 나오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구원에 감사하는 신앙이 되지 않는다면 근본적인 비참함인 죄의 비참함에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목숨을 걸어 봅시다. 그리고 표면적 문제의 해결 뿐 아니라, 근본적인 죄의 비참함에서 벗어납시다. 그러니 주님이 뭐라 하시던지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감사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만약 하나님께 향한 감사가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립시다.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이 담긴 감사는 참된 믿음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그러니 구원 얻는 참된 믿음으로 자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기 원하시는 분들은 다함께 찬송가 429장으로 주신 말씀에 응답찬송을 올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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